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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시간 다리 유래 ,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

 

북한 귀순병사가 탑승한 차량의 귀순경로 cctv 공개되면서 북한병사가 목숨걸로 넘어온 72시간 다리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북한군이 귀순 당시 72시간 다리를 건너 이동하자 주변의 건물에서 북한군 병사들이 다급하게 뛰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72시간 다리는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이후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폐쇄된 후 북측에서 72시간 만에 만든 다리 말합니다

1976년 8월18일 유엔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조지 보니파스 대위와 소대장 마크 토머스 배럿 중위, 한국노무단소속 노동자들 11명은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기위해서 남쪽에 있는 유엔군 측 사령부 3경비 초소근처로 향했습니다. 15m 높이의 미루나무의 잎 양이 늘어나 유엔군 전망대에서 북한군 동향을 살피기 어려워졌기 때문인데요. 

 

 

나무에 올라가 나뭇가지를 치고 있는 작업반들에게 북하군 박철 중위 등 15명이 다가갔고 더는 가지를 치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작업 감독을 하던 남측의 장교 김문환 대위가 미국 인솔 장교 보니파스대위에게 통역하는 사이에 북한 장교 2명과 사병 30명은 가지를 더 치면 죽여버리겠다 며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분위기가 고조되며 폭력은 격해지고 이들은 나무 밑에 있던 도끼,곡꽹이,삽을 집어 유엔군을 갑자기 습격했습니다.

당시 북하군의 급습으로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중위가 사망하게 되었고, 카투사5명 미군 병사 4명 총 9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측 유엔군 3초소는 파손되었고, 유엔군 소속의 차 3대도 망가졌습니다.

북한군인의 도발에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의 명령으로 리처드 스틸웰 주한미군사령관은 "풀 버니언 작전" 시행했습니다.

북한군의 추가 도발을 막으려 항공모함 미드웨이호와 핵무기 탑재가 되는 폭격기 3대 동원해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작전을 벌였습니다.이들은 결국 미루나무를 자르는데 성공했습니다.

북한측은 이후 김일성 명의로 사과를 했습니다. 유엔사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후 공동경비구역 내에 군사분계선을 그어서 남한 북한이 서로 넘지 못하게 했는데요.

또한 53년 정전협정 때 포로를 교환했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도 패쇄했습니다. 북측은 이 다리는 이용하지 못하게 되자 72시간만에 다리를 다시 세웠고 그래서 이 다리가 72시간 다리 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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